가야 연맹의 출발
가야의 시작은 한반도 남쪽에 위치한 변한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변한은 마한이나 진한과 같은 소국으로 이루어진 집단이었습니다. 초기 가야 연맹을 이끌었던 건 금관가야입니다. 금관가야를 세운 인물은 우리에게도 유명한 김수로입니다. [삼국유사]에 가야의 건국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경남 김해 지역에는 아홉 명의 족장이 각자의 지역을 다스리고 있었는데, 어느 날 작은 산봉우리인 구지봉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이상한 소리의 정체는 일종의 예언이었습니다.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밀어라. 내밀지 않으면 구워서 먹으리"라는 노래를 부르면 왕을 맞이하게 될 거라는 말이었죠. 족장들이 노래를 부르니까 하늘에서 금빛 상자가 내려왔습니다. 상자 안에는 황금색 알이 여섯 개 들어 있었는데, 알을 깨고 여섯 아이가 나왔다고 합니다. 가장 먼저 태어난 아이가 바로 김수로였어요. 여섯 아이가 태어났다는 이야기는 그들이 각각 다른 가야를 이끌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김수로가 세운 금관가야 외에도 대가야, 고령가야 등이 있었죠. 그러니까 가야는 연맹체였고, 김수로가 다스리는 금관가야는 그 연맹체의 중심이었던 것입니다.
부의 원천, 철
가야는 요즘 말로 표현하자면 하이테크 강국이었습니다. 금관가야가 있던 낙동강 하류는 땅이 비옥한 것은 물론이고, 철이 무척 많이 나왔어요. 원래 김해라는 이름이 '쇠'와 '바다'를 뜻합니다. 그만큼 쇠가 많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김해 지역에 있는 야산에 가서 강한 자석을 들이대면 쇳가루가 붙어나올 정도입니다. 양질의 철이 굉장히 많은 곳이죠. 철은 청동기시대 사람들의 상상을 초월하는 물질이었어요. 청동으로 만든 무기랑 철로 만든 무기가 붙으면 게임도 안 됩니다. 철은 청동보다 훨씬 단단해서 무기는 물론이고 각종 농기구와 도구로 만들어 활용하기 좋았어요. 게다가 청동기시대에 청동은 신분이 높은 사람만 가질 수 있는 귀한 물질이었던 데 반해 철은 아주 흔했지요. 다만 이 철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제련하는 기술이 필요했습니다. 온도가 1,100도 이상 올라가야 철이 녹기 때문입니다. 가야에는 그런 기술이 있었어요. 그래서 철은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었던 겁니다. 가야의 무덤에서 출토된 것들을 보면 사람이 입은 갑옷뿐만 아니라 말이 쓰는 갑옷도 있습니다. 그만큼 철을 많이 사용했던 것입니다. 가야는 뛰어난 철기 제작 기술로 덩이쇠를 만들었어요. 덩이쇠는 뼈다귀처럼 가운데가 살짝 들어간 막대 모양의 철판인데, 화폐처럼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반도체가 있어야 현대 사회가 움직이듯이 당시에는 철로 만든 도구가 있어야 생산력이 올라가고 강국이 됐습니다. 그러니까 주변 국가에서 철을 구하기 위해 가야로 몰려들었어요. 금관가야가 가야 연맹의 수장으로 우뚝 설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풍부했던 철과 철을 다루는 기술, 그리고 낙동강 하류를 따라 바다로 나아갈 수 있는 위치 덕분에 기술 강국이자 무역 강국으로 거듭난 것입니다. 그 때문일까요? 김수로왕은 우리나라 최초로 국제 결혼을 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김수로왕의 왕비는 아유타국 공주라고 알려져 있어요. 아유타국은 지금의 인도에 위치한 나라였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두 사람의 결혼 이야기를 통해 가야가 바다 건너 제법 먼 나라와도 교류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금관가야에서 대가야까지
금관가야에는 철을 다루는 기술을 배우러 온 일본인이 굉장히 많았습니다. 일본에는 그런 기술이 없었거든요. 그러니까 일본인들이 가야로 유학을 왔던거지요. 당시 일본은 '왜'라고 불렸는데, 4세기 말에 이 '왜'가 신라에 쳐들어갔습니다. 신라로서는 엄청난 위기였어요. 수도인 경주가 함락되기 직전이었습니다. 신라로서는 엄청난 위기였어요. 다급해진 신라는 고구려에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그래서 고구려의 왕이었던 광개토대왕은 직접 5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신라로 내려왔습니다. 한반도 남쪽에 고구려 군대가 내려온 건 그때가 처음이었어요. 광개토대왕은 왜군을 모두 몰아냈어요. 고구려군에 쫓기던 왜군은 금관가야까지 도망쳤지요. 배를 타고 일본으로 도망갈 수 있는 곳이기도 했고, 그곳에 자신들에게 우호적인 일본인이 많이 살고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고구려군은 도망가는 왜군을 내버려두지 않았습니다. 끝까지 추격했어요. 고구려의 공격을 받게 되자 잘나가던 금관가야는 급격히 쇠퇴했습니다. 그러면서 가야 연명의 주도권이 지금의 고령 지역에 있던 대가야로 완전히 넘어가게됩니다. 광개토대왕이 가야 연맹의 정치 지형을 바꿔놓은 셈이죠. 가야는 철을 보유하고 있어 부유했지만, 고구려, 백제, 신라처럼 왕을 중심으로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갖춘 고대국가로 발전하지는 못했어요. 각 나라가 독자적인 권력을 가진 채 끝까지 연맹왕국에 머물렀지요.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잘살았다는 점이 오히려 걸림돌이 되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지금도 딱히 부족한 게 없는데 굳이 합쳐야 하나?", "영토 확장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요? 현재가 너무 만족스러우면 미래를 대비하는 일에 소홀할 수 있잖아요. 어쩌면 가야인들은 철저한 상인 마인드를 가지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무역을 통해 많은 돈을 벌기는 했지만 강력한 중앙 집권 국가를 만드는 데는 큰 관심이 없었던 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