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정부의 과제
1948년에 수립된 제1 공화국 이승만 정부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두 가지였습니다. 첫 번째는 정의를 세우는 것이었어요. 친일파를 비롯한 민족 반역자들을 처벌하는 거였지요. 역사의 심판이 얼마나 두려운 것인지 모두에게 알릴 수 있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당장의 호의호식을 위해 침략자들에게 협력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나중에 비슷한 일이 생겼을 때 그런 행동을 하지 않게 될 테니까요. 역사를 바로 세우는 일은 많은 사람에게 올바른 상상력을 심어주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상상력이 부족하면 자꾸 실수를 하게 되거든요. 내가 이런 선택을 해도 될까? 이런 행동을 하는 게 맞을까? 이런 생각을 할 때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상상할 수 있는 근거가 바로 역사입니다. 그래서 정의가 필요합니다. 일본에 빌붙은 사람은 처벌받는다는 결과가 있어야 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승만 정부의 구성원들은 일제강점기에 일제에 빌붙어 행정 능력을 키웠던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남북의 대치 상황 속에서 '반공'만을 외쳤어요. 대한민국에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세우는 것을 우선으로 했습니다. 과거의 잘못 보다도 현재의 문제가 중요하다고 판단한 거예요. [반민족행위처벌법]이 제정되고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구성되었지만, 정부는 협조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방해를 했지요. 친일 부호 박흥식, 황국 신민을 찬양한 이광수를 비롯해 많은 사람이 검거되었지만, 대부분 풀려나고 말았어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의 노력은 좌절되었고, [반민족행위처벌법]마저 폐지되고 말았습니다. 친일 행위를 했던 사람들에 대한 처벌은 결국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계속해서 기득권 세력으로 남았어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건강한 상상력을 갖게 될 리가 없지요. 나라를 팔아먹은 사람들은 잘 사는 반면, 나라를 위해 싸운 사람들은 힘들게 살고 있잖아요. 그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데, 누가 올바른 선택을 하기 위해 노력할까요. 이런 전례가 만들어졌다는 사실이 참 안타깝습니다.
이승만 정부의 두 번째 과제는 농지개혁이었습니다. 농민들의 꿈은 자기 땅을 갖는 거예요. 일제강점기에는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독립이 되었으니 농민들 입장에서는 땅을 갖고자 하는 열망이 커졌을 겁니다. 이 부분은 정부에서도 나름대로 노력을 했어요. 자유민주주의 국가이니 북한처럼 무상몰수와 무상분배를 할 수는 없었고, 유상매입과 유상분배를 했습니다. 정부가 돈을 주고 땅을 사들인 다음, 농민들에게 다시 돈을 받고 판 거예요. 이 같은 방식으로 농지 개혁에는 어느 정도 성과를 내기도 했습니다.
발췌 개헌과 사사오입 개헌
1948년 제헌 국회가 재정한 제헌 헌법은 대통령을 간선제로 뽑도록 규정했습니다. 임기는 4년이고, 한 차례 중임이 가능했지요. 이승만도 국회에서 선출한 대통령이었습니다. 그런데 5.10 총선거에 이은 두 번째 국회의원 선거 결과, 이승만을 지지하지 않는 사람들이 대거 당선되었어요. 쉽게 말해 이승만은 중임이 어려워진 상황이었습니다. 1952년 이승만 정부는 국회의원들을 협박해 대통령 간선제를 직선제로 바꿨습니다. 국민들이 직접 투표해서 대통령을 뽑게끔 한 것입니다. 자신에게는 직선제가 유리할 것이라 생각한 것입니다. 예상대로 이승만은 다시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문제는 그다음입니다. 이승만 정부는 정권 유지를 위해 또다시 헌법을 고치려 했어요. '초대 대통령에 한해서는 중임 제한 규정을 없앤다'는 내용을 넣기 위해서였습니다. 1954년 헌법 개정안은 국회 표결에 부쳐졌습니다. 재적의원 203명 중 3분의 2인 135.333... 명이 찬성해야 가결이 되는 상황이었어요. 투표에는 202명의 국회의원이 참여했고, 찬성표를 던진 사람은 135명이었습니다. 부결이 된 거지요. 그런데 집권당인 자유당은 여기에 수긍하지 않았습니다. 수학에 등장하는 반올림을 언급하면서 135.333... 은 135와 같다는 거예요. 이런 억지 논리로 결국 개헌을 실시해 버립니다. 그래서 이 사건을 사사오입 개헌이라고 해요. 이 결과 이승만은 1956년 3번 연속 당선에 성공합니다. 헌법은 약속이고, 누구나 그 약속을 지켜야 합니다. 민주주의 사회는 그 약속에 의해 움직입니다. 그런데 이승만 정부는 자꾸 약속을 어겼습니다. 왜곡된 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지요. 분명한 잘못이지만, 한편으로는 우리에게 연습이 너무 부족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서구의 민주주의는 몇백 년에 걸쳐 무수한 피를 보면서 만들어졌는데, 우리나라에는 단번에 들어온 거잖아요. 그러니까 아무래도 우왕좌왕하게 되지요. 결국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는 이 땅의 시민들에 의해 계속 발전하게 됩니다.
3.15 부정선거와 4.19 혁명
1960년 3월 15일 제4대 대통령 선거가 열렸습니다. 이승만 정부는 이 선거에서 대대적인 부정행위를 저질렀습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나이가 너무 많았어요. 대한제국 시절 독립협회에서 활동했던 인물이잖아요. 만일 건강에 문제가 생긴다면 부통령이 대통령 직을 잇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당의 부통령 후보인 이기붕은 인기가 별로 없었습니다. 야당 후보의 당선이 유력한 상황이었습니다. 만일 야당 후보가 부통령으로 선출되고 대통령이 건강상의 문제로 물러나게 되면 정권이 넘어가게 되겠지요. 자유당은 그 사태를 막기 위해 부정 선거를 치른 것입니다. 이승만 정부는 투표함을 바꿔치기하거나 사람들에게 돈을 주고 찍을 번호를 알려주는 등 갖가지 방법을 동원했습니다. 예를 들어 한 마을에 유권자 수가 100명인데 이기붕을 찍은 표가 150표 가까이 나오는 웃긴 상황도 있었지요. 이 사실을 알게 된 학생들은 광장에 나와 민주주의를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그 시절 엘리트는 두 그룹으로 나눌 수 있어요. 한 그룹은 미군 아래에서 교육을 받은 군인들이었고, 또 한 그룹은 근대적 교육을 받은 학생들이었습니다. 학생들은 부정선거와 독재에 항의하며 시위를 펼쳤습니다. 경찰은 이들에게 총을 쏘았어요. 그런데 시위에 참여했던 김주열이라는 학생이 실종되었습니다. 고등학교 합격 여부를 확인하러 마산에 갔던 김주열은 며칠 뒤 마산 앞바다에서 처참한 모습으로 발견되었습니다. 김주열의 사진이 신문에 실리면서 수많은 사람이 분노했습니다. 학생들의 대대적인 시위에 시민들이 참여했고, 교수들은 시국 선언문을 발표하며 동참했어요. 4.19 혁명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 일로 이승만은 결국 하야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시민 혁명을 통해 민주주의가 실현된 첫 사례로 아주 의미 있는 역사적 사건이라고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