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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한 한국 역사 이야기: 선덕여왕의 매력 발산

by ucodehouse 2024. 10. 23.

어질고 총명했던 여왕

 선덕여왕은 신라의 제27대 왕입니다. 여성이 신라의 왕이 된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신라의 골품제를 이해해야겠습니다. 신라는 성골, 진골, 육두품 등 신분에 따라 등급이 나뉘어 있었습니다. 그중에 왕이 될 수 있는 등급은 성골뿐이었습니다. 원칙적으로는 같은 골품끼리만 결혼을 할 수 있었고, 다른 골품끼리 결혼을 할 경우 낮은 등급으로 골품이 내려가게 됩니다. 그러다 나중에는 성골이 귀해지게 되고 심지어는 왕위를 이를 남자 성골이 한 명도 남지 않게 된 겁니다. 그래서 진평왕의 딸인 덕만공주가 결국 왕위에 오르게 된 것입니다. 선덕여왕에 대한 전반적인 평가를 찾아보면 선정을 베풀어 민생을 향상했고, 구휼사업(사회적, 국가적 차원에서 재난을 당한 사람이나 빈민을 구제하는 일)에 힘썼으며, 첨성대와 황룡사 9층탑을 건립하는 등의 업적을 남겼다고 전합니다. 이런 평가들을 보면 선덕여왕이 백성을 아끼는 마음이 크고, 인품과 학식을 고루 갖춘 인물이었음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여자이다 보니 주변국에서 선덕여왕을 얕보는 시선들이 꽤 있었어요. 비담처럼 여자가 왕이라는 이유로 반란을 일으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라이벌 백제와의 크고 작은 전쟁에도 끊임없이 시달려야 했습니다. 심지어 후대에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사기]에서는 선덕여왕을 두고 "여자를 왕으로 삼았는데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게 다행이다"라고 평하기도 하였습니다.


여왕의 향기, 여왕의 지혜

 선덕여왕이 어떤 사람인지 가장 잘 보여주는 일화가 분황사 모전석탑과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우선 분황사 모전석탑의 뜻을 풀어보면, 분황사는 황제의 향기를 담은 절이라는 의미이고, 모전석탑은 벽돌을 모방한 석탑이라는 뜻입니다. 원래 벽돌은 점토로 만드는데, 한반도의 흙은 중국과 달라 벽돌을 만들기에 적합하지 않았습니다. 탐은 쌓아야겠는데 벽돌을 만들 수가 없어 안산암을 직육면체 벽돌 모양으로 깎고 여기에 화강암을 덧대 쌓았기 때문에 벽돌을 모방한 석탑이라고 이름을 붙인 것이랍니다. 이보다 더 흥미로운 게 분황사라는 이름의 유래입니다. [삼국사기]에는 이런 일화가 전해집니다. 당나라의 태종 황제가 어느 날 선덕여왕에게 붉은색, 자주색, 흰색의 세 가지 색으로 그린 모란꽃 그림과 모란꽃 씨앗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선덕여왕이 그 그림을 보고 "이 꽃은 정녕 향기가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꽃씨를 심어 꽃이 피기를 기다렸는데, 실제로 꽃에서 향기가 나지 않았습니다! 훗날 이를 신기하게 여긴 사람들이 꽃에 향기가 없을 것이라는 것을 어찌 알았느냐고 물어보자 선덕여왕은 이렇게 말합니다. "꽃은 그렸지만 나비는 없었다. 그래서 향기가 없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것은 당나라 황제가 내가 남편이 없는 것을 비웃은 것이다." 어쩌면 당나라 태종이 선덕여왕을 놀렸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에 선덕여왕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당나라 황제에게 대응합니다. 왕으로 즉위하고 3년이 지난 634년에 선덕여왕은 절을 짓고는 '황제의 향기'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 절이 바로 분황사입니다. 이렇게 당나라 황제와 선덕여왕이 소통했던 방식을 보면, 그 본질은 조롱일지라도 표현이 무척 절제되고 옛사람들만의 멋이 난다는 생각이 듭니다. 직접 말을 주고받는 게 아니라 문화와 은유로 대화하는 방식이 참 품위 있지 않나요? 무엇보다 이 모든 일화를 통틀어 알 수 있는 사실은 선덕여왕이 지혜를 갖춘 사람이었다는 점입니다. 당나라 황제가 보낸 그림을 보고 자신에 대한 조롱이라는 것을 알아채는 식견이 있었으니까요.


재색을 겸비했던 아름다운 여인

 실제 선덕여왕은 인품과 지혜뿐 아니라 외모도 뛰어났던 것 같습니다. [삼국유사]나 조선시대 백과사전인 [대동운부군옥] 같은 책에 선덕여왕과 관련된 이런 일화가 전해집니다. 선덕여왕의 미모가 워낙 뛰어나 여왕이 한번 경주 성내에 나서면 온 백성이 몰려들어 여왕을 보려고 안달했다고 합니다. 그중에서도 아주 열성 팬이 한 명 있었습니다. 바로 지귀라는 청년이었는데, 선덕여왕을 너무 좋아한 나머지 상사병에 걸려 몸이 점점 야위어갔다고 합니다. 하루는 선덕여왕이 절을 찾았는데 그 소식을 들은 지귀가 절에서 선덕여왕을 기다리다가 깜빡 잠이 든 겁니다. 하필 그때 선덕여왕이 절을 나서면서 자신을 기다리다 잠든 지귀를 보고 사모해 주는 마음이 고마워 차고 있던 팔찌를 지귀의 가슴에 놓고 떠났다고 합니다. 잠에서 깬 지귀가 비록 선덕여왕은 못 봤지만 팔찌를 자신에게 내준 여왕의 마음에 너무 감격한 나머지 온몸에서 불이 나 그 마을을 홀딱 태워버렸다는 이야기가 설화로 전해집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경주에서 크고 작은 화재가 자주 일어나 백성들이 큰 피해를 입었고, 이에 선덕여왕이 시를 적어 경우 곳곳에 붙여놓으니 그제야 화재가 멈췄다고 합니다. 그야말로 옛날이야기지만, 남자의 가슴에 불꽃이 일어 온 나라에 불이 났다는 이야기가 전하는 걸 보면 선덕여왕이 매력 넘치는 여자가 아니었을까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여왕이 승하한 후 신라는 점점 힘을 키워 삼국 통일까지 이루게 됩니다. 선덕여왕이 내부적으로 왕권을 강화하면서 민생을 안정시키고, 삼국 통일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당나라와 외교 관계를 잘 유지했기에 통일이 가능했던 게 아니었나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