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군이 될 수밖에 없었던 의자왕
의자왕을 왜 의자왕이라고 부르는지 아십니까? 어떤 이들은 의자왕이 밤마다 삼천궁녀와 노느라 힘들어서 낮에는 의자에만 앉아 있다가 그만 의자왕이 되고 말았다는 우스갯소리들을 합니다. 의자왕은 사실 옳은 '의', 사랑할 '자'라는 이름처럼 의롭고 자애로운 임금이었습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의자왕은 태자 때부터 부모에 대한 효심이 지극하고 형제들과 우애가 깊어 '해동의 증자'로 불렸다고 하니, 그 인품만 봐도 성군이 될 자질이 뛰어났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성품을 타고난 의자왕은 약 10년간의 태자 생활을 통해 예비 군주로서 탄탄한 수련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긴 태자 생활을 마치고 641년 드디어 왕위에 오르는데, 이때 의자왕은 남자다운 연륜과 통찰력을 지닌 인물이었을 것입니다. 한마디로 인생의 절정기에 권력을 잡은 것입니다. 따라서 너무 어리거나 늙어서, 혹은 경험이 없거나 직계가 아니라는 이유로 생길 수 있는 권력의 공백과 시행착오 따위는 전혀 없었던 상황이라는 것입니다. 왕위에 오른 의자왕은 그간의 연륜과 경험을 바탕으로 집권 초기에 정치, 외교, 군사는 물론 민심까지 잡으면서 다방면에서 훌륭한 자세를 보입니다. 일단 즉위하자마자 본인을 견제하던 친척들과 기존 고위 관리 등 40여 명을 섬으로 추방해 버리는 결정을 합니다. 왜일까요? 이제 왕이 되었으니 그동안 자신을 견제하던 세력들은 싹을 잘라야 후환이 없지 않겠습니까? 더구나 당시 백제는 귀족 세력의 견제로 왕권이 흔들리던 상황을 막 벗어나 왕권을 강화해 나가던 시점이었습니다. 그러고는 직접 주, 군을 순찰하며 죄소들을 사면해 주는 등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영토의 확장 또 확장
내부 권력 기반을 탄탄히 다진 의자왕은 이제 밖으로 뻗어나가기 시작합니다. 라이벌인 신라와의 싸움에서 연이어 승리하면서 자신의 군사적, 외교적 역량을 과시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즉위한 다음 해에 직접 군사를 이끌고 신라를 공격해 40여 성을 함락했고, 바로 다음 달인 8월에는 신라의 전략적 요충지인 대야성을 공격해 함락하는 등 신라를 위기로 몰아넣습니다. 이때 신라 최고의 귀족이었던 김춘추의 딸과 사위가 목숨을 잃었습니다. 당시 김춘추가 너무 슬퍼 온종일 기둥에 기대서서 눈을 한 번도 깜빡이지 않았다는 기록이 전해질 정도였죠. 의자왕은 즉위하자마자 경쟁국인 신라를 충격과 공포 속에 몰아넣은 무시무시한 정복 군주였던 것입니다. 당황한 신라는 중국 당나라에 구원을 청하기에 이르는데, 당시의 국제 관계를 지도로 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그 후에도 백제는 645년 신라의 일곱 개의 성을 공격해 빼앗았으며, 655년에는 고구려, 말갈과 함께 신라의 30여 성을 부수는 등 전쟁의 주도권을 쥐는 듯했습니다. 그러나 신라와 당나라가 연합군을 결성해 무려 18만 대군을 이끌고 백제를 공격합니다. 나당 연합군의 엄청난 인해전술에 계백이 이끈 5천 명의 군사가 용감히 맞서 싸웠으나, 결국 수적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비운의 최후를 맞이하다
이때 의자왕은 태자와 함께 웅진성으로 피신하고, 그곳에서 군을 모아 사비성을 되찾을 계획을 세웁니다. 그러나 웅진성으로 들어간 지 닷새 만에 의자왕은 어이없게도 그냥 항복하고 말았습니다. 왜일까요? 그 의문의 실마리는 2006년 중국 북망산에서 예식진이라는 사람의 무덤과 묘비가 출토되면서 풀리게 됩니다. 예식진은 할아버지 대부터 최고 벼슬을 지냈던 백제의 귀족 출신으로, 백제 멸망 후 당나라의 대장군까지 오른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구당서]에 그와 관련해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그 대장 예식이 의자왕을 거느리고 항복하게 하였다." 이는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에 기록된 백제 멸망 과정과도 맥을 같이하는 내용입니다. "웅진의 수성 대장(예식진으로 추정됨)이 의자왕을 잡아 항복하라 하니 왕이 동맥을 끊었으나 끊기지 않아, 당의 포로가 되어 묶이어 가니..." 이 두 기록은 의자왕이 스스로 당나라에 항복했던 것이 아니라, 믿었던 신하인 예식진에게 배신당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의자왕이 예식진이 지키고 있는 웅진성으로 몸을 피해 왔는데, 예식진이 의자왕을 배신하고 당나라에 항복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삼국유사]에는 의자왕이 태자 및 웅진방령군을 거느리고 스스로 웅진성을 나와 항복했다고 기록되어 있어서, 무엇이 사실인지는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