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요즘에는 많은 학생들이 수학여행을 제주도로 가거나 간호 해외로 나가는 경우도 있죠? 그런데 예전에는 수학여행이라고 하면 떠올리는 곳은 단 한 군데였습니다. 바로 경주입니다. 그리고 경주 수학여행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가 바로 석굴암이었습니다. 아마 여러분도 학생 때 한 번쯤은 석굴암을 방문한 기억이 있을 겁니다. 설령 가본 적이 없다 해도 석굴암은 책이나 텔레비전을 통해 누구나 한 번쯤은 보았을 법한,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 문화재입니다. 이렇듯 아주 친숙한 존재인 석굴암인데, 만약 어떤 외국인이 다가와 석굴암의 가치에 대해 묻는다면 여러분은 막힘없이 대답할 수 있나요? 석굴암과 불국사는 1995년에 우리나라에서 세 번째로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된 세계적인 문화유산인데 말이죠. 석굴암 본존불은 경주 동남쪽에 위치한 토함산에서 일출이 아주 잘 보이는 위치에 동해를 바라보며 앉아 있습니다. 아마도 천 년 전 신라 사람들은 떠오르는 태양 빛을 반사시키며 영롱한 빛을 내는 본존불의 이마를 보며 부처님의 진리의 빛이라고 느끼지 않았을까요? 또는 은은한 미소를 띤 석굴암 본존불을 바라보며 부처님의 자비를 느끼고, 사실적으로 조각된 수많은 조각상을 보며 부처님의 존재를 피부로 느낄 수 있지 않았을까요? 그럼 이제부터 석굴암과 관련된 역사에 대해 더 알아보도록 합시다.
석굴암 탄생의 배경
먼저 석굴암이 어떻게 탄생했는지부터 살펴볼까요? 석굴암은 통일신라가 아주 높은 문화적 수준을 꽃피웠던 8세기에 건설되었습니다. 8세기의 통일 신라는 왕권이 강화되고, 당나라와 활발하게 교류하면서 나라가 안정되었던 시기였습니다. [삼국유사]에는 경덕왕 대의 재상은 김대성이라는 사람이 현생의 부모님을 위해 불국사를, 전생의 부모님을 위해 석불사를 세웠다고 전하는데, 이 석불사가 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석굴암입니다. 세계 유일의 인공 석굴 사원인 석굴암은 경덕왕 때인 751년부터 제작되기 시작해서 774년에 완성되었습니다. 20년이 넘는 시간을 들여 제작한 것이죠. 그렇다면 김대성은 왜 하필 석굴사원을 만들 생각을 했을까요? 불교의 발원지인 인도나 우리나라에 불교를 전해준 중국에서는 암벽을 파서 굴을 만든 다음 그 안에 사원을 꾸리는 석굴 사원 제작이 유명했어요. 하지만 우리나라는 이런 유행을 따르기가 힘들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지반은 중국과 달리 단단한 화강암이 대부분이라 암벽을 파낸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거든요. 그래서 김대성은 암벽을 파내는 대신, 적당한 크기로 다듬은 돌을 조립해서 동굴 구조를 만들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석굴 사원을 만들어내겠다는 김대성의 의지도, 그 의지를 실제로 구현해 낸 신라 장인들의 기술도 모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치밀한 수학적 계산으로 설계된 석굴암
앞서 석굴암이 우리나라에서 세 번째로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된 뛰어난 문화유산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석굴암의 뛰어난 점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눠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본존불을 비롯한 주변의 여러 조각들이 아름답고 정교하게 제작되었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석굴암을 건설할 때 매우 치밀한 수학적 계산과 건축 기술을 사용했다는 점입니다. 본존불의 높이와 너비, 통로의 길이와 너비, 본존불이 앉아 있는 방의 크기, 본존불 뒤에 배치된 조각들의 배열 등 석굴암 제작에 필요한 모든 수치가 철저하게 계산된 비례를 따른다는 것입니다. 특히 석굴암의 천장은 돔 형태를 하고 있는데, 돔이 지금은 흔하지만 사실 굉장한 기술력이 필요한 건축 형태입니다. 석굴암의 천장은 360개의 돌로 정교하게 돔을 짜 맞추고 그 사이사이에 일종의 균형 장치라 할 수 있는 쐐기돌을 박아넣은 형태인데, 이 구조가 아주 튼튼해서 20톤이나 되는 천장의 뚜껑돌을 천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지탱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본존불 뒤편의 광배는 약간 타원형으로 생겼는데, 예배자가 아래에서 본존불을 올려다보면 석굴암의 얼굴이 광배의 한가운데에 위치하고 광배도 타원형이 아닌 원형으로 보인다고 하니, 석굴암은 예배자의 시선까지 고려해서 만든 디테일의 극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