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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한 한국 역사 이야기: 공민왕의 개혁과 슬픈 결말

by ucodehouse 2024. 10. 24.

공민왕 집권기의 정세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고려의 제31대 왕 공민왕입니다. 당시 상황을 잠깐 살펴보겠습니다. 우리나라가 다른 나라의 지배를 받은 적이 두 번 있습니다. 정확히는 한 번의 지배와 한 번의 간섭입니다. 가깝게는 일본에 나라를 빼앗겼던 일제강점기가 있고, 멀게는 고려시대에 몽골, 즉 원나라에 지배당했던 원 간섭기가 있죠. 대략 13세기부터 14세기까지 80여 년간 고려는 원나라의 간섭을 받았습니다. 고려가 몽골에 항복한 후 고려는 몽골의 '부마국'이 되었습니다. 부마는 왕의 사위를 가리키죠. 즉 원나라의 공주를 고려의 왕에게 시집보내는 겁니다. 그러면 고려의 왕은 원나라 황실의 사위가 되는 거예요. 보통 우리나라 왕 이름을 보면 뒤에 ''''이 붙습니다. 이는 왕의 치적을 기리기 위해 붙여주는 것인데, 원나라의 지배를 받았던 시기의 왕들은 그냥 ''으로 불렸습니다. 게다가 더 굴욕적 이게도 앞에는 원나라에 충성한다는 의미로 ''까지 붙였습니다. 충렬왕, 충선왕, 충숙왕, 충혜왕, 충목왕, 충정왕이 이에 해당되죠.


공민왕의 개혁 정책

 공민왕도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고려가 원나라의 간섭을 받던 시기의 왕이었지만, 당시 원나라의 힘이 약해지고 한족의 명나라가 강해지는 분위기를 타고, 국가의 자주성을 키워가며 몽골의 색깔을 씻어내는 데 주력했어요. 우선 행정조직을 개편해 왕의 권한을 강화했습니다. 이전까지 왕은 허수아비였고, 정방이라는 곳에서 힘있는 권문세족들이 자기 마음대로 나라를 주무르고 있었거든요. 공민왕은 이 정방을 없애고, 토지와 노비 문제를 해결하면서 부패한 관리들을 투옥하는 등 강도 높은 개혁 정치를 펼쳤습니다. 특히 고려에는 자기 집안의 딸이 원나라 황제의 황후가 되자 하늘 높은 줄 모르고 횡포를 부리던 기씨 일족이라는 친원 세력이 있었어요. 공민왕은 왕위에 오르자 이 기 씨 일족을 제거해 버립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쌍성총관부(원나라가 고려 이북을 차지하고 설치했던 통치기구)를 무력으로 공격하여 수복하는 등 원나라에 빼앗겼던 영토도 회복합니다. 이 정도만 들어도 업적이 대단하지요? 그래서 고려 후기는 물론이고, 고려 전체를 보아도 태조 왕건과 함께 가장 중요한 왕으로 평가받는 왕이 바로 공민왕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훌륭한 공민왕이 역사책에는 과연 어떻게 적혀 있을까요? 우리가 공민왕의 이야기를 접할 수 있는 기록이 대부분 조선시대에 쓰인 책인데, 그 책들을 보면 공민왕 치세 말기에 대해 비판적인 내용이 많습니다. 비단 공민왕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고려라는 나라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이 대부분이죠. 아시다시피 조선은 고려를 무너뜨리고 세워진 나라잖아요? 그러니 고려에 대해 부정적으로 기술하면서 조선 건국의 정당성을 내세우는 것입니다.


공민왕의 처음이자 마지막 사랑

 원 간섭기의 고려는 왕자들을 원나라에 인질로 보내는 절차가 있었어요. 공민왕 역시 열두 살에 몽골에 보내져 왕이 될 때까지 원나라 황실에서 살았습니다. 이때 원나라 황실 가문의 딸 노국공주와 정략결혼을 하게 되죠. 남이 시켜서 하는 결혼을 반기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만, 다행스럽게도 공민왕은 노국공주가 무척 마음에 들었던 모양입니다. 어린 공민왕은 고려에 두고 온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마음도 컸기에, 노국공주를 아내처럼 사랑하면서, 때로는 어미니처럼 의지하면서 원나라에서 하루하루를 보냈다고 전해집니다. 그렇게 노국공주와 알콩달콩 사랑을 하던 공민왕은 스물두 살에 고려로 돌아와 고려의 왕이 됩니다. 그리고 앞서 말씀드린 대로 과감한 개혁 정치를 펼치죠. 이때 노국공주는 어땠을까요? 노국공주는 언급한 대로 원래 원나라 황실의 딸입니다. 공민왕이 원나라에 반하는 정책을 펴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야 하는 위치였지만, 그녀는 오히려 아버지의 나라에 등을 돌리고 남편의 나라인 고려를 품었습니다. 반대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협조하여 자주적인 고려를 세우는 데 큰 기여를 했다고 전해집니다.

 모든 관계가 그렇지만 연애도 어떤가요. 매일매일 즐겁고 행복하게 좋은 모습만 본다고 해서 꼭 그 관계가 돈독해지진 않죠. 때로는 힘든 일도 겪고 같이 위기도 넘기면서 동고동락할 때, 서로에 대한 신뢰가 쌓이고 애정도 더 깊어진다고 하잖아요. 공민왕과 노국공주도 마찬가지였어요. 공민왕이 돌아왔을 때 고려는 엄청난 혼란의 연속이었습니다. 밖으로는 남쪽에서 왜구가, 북쪽에서 홍건적이 침입해 들어왔거든요. 여담입니다만, 홍건적이 쳐들어왔을 때 공민왕과 노국공주는 경상북도 안동까지 피난을 가야 했는데요, 그때 큰 개울을 건너면서 노국공주가 물에 젖지 않도록 온 동네 여자들이 나와 개울물에 엎드린 후 그 등을 밟고 건너가게 했다고 해요. 또한 고려 내부에서는 공민왕의 개혁에 반대하는 친원 세력들이 반란을 일으켜 공민왕은 죽을 위기를 몇 번이나 넘겼습니다. 신하들이 공민왕을 죽이려 할 때, 노국공주는 왕을 방으로 피신시킨 후 문 앞을 지키고 서서 자신의 목숨을 걸고 끝까지 보호했다고 하니, 이런 여인을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이쯤에서 감이 오나요? 왕비가 멋진 왕자를 낳아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다면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사랑 이야기가 지금까지 전해졌을까요? 아니죠. 유명한 이야기에는 꼭 비극적인 사연이 있습니다. 노국공주는 아이를 낳다가 그만 난산으로 인해 생명이 위독한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때 공민왕은 일급 죄인까지 사면해 주며 공주의 무탈을 기원합니다. 그러나 노국공주는 왕의 간절한 기도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공민왕은 그토록 사랑했던 아내가 죽자 얼마나 슬펐는지 직접 공주의 초상화를 그려두고 밤낮으로 초상화와 함께하며 울었고, 3년 동안이나 고기반찬을 입에 대지 않았습니다. 고려사에 '노국공주가 죽은 뒤로는 과도하게 슬퍼하여 의지를 상실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을 정도이니, 그 슬픔과 상실감이 상상이 가시는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