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첫 번째 왕, 왕건
본격적인 이야기에 앞서 태조라는 이름에 대해 먼저 알아볼까요? 태조는 나라를 세운 왕입니다. 그 뒤에 나라의 기틀을 다져 나라를 세운 것에 버금가는 업적을 남긴 왕을 태종이라고 하고, 모든 제도와 문물을 완성한 왕은 성종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태조나 성종은 고려에도 있고 조선에도 있는 것입니다. 어쨌거나 왕건은 고려를 세운 왕이고, 그렇기에 태조가 되는 것입니다. 왕건은 원래 개성 출신의 호족으로 궁예 아래에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전투에서 승승장구하며 신망을 얻었고, 궁예의 폭정이 계속되자 나중에는 궁예를 몰아내고 자신이 왕이 됩니다. 이후 후고구려의 국호를 고려로 바꾸고, 신라와 후백제를 통합하여 후삼국을 통일합니다. 왕건은 나라를 처음 세운 왕인만큼 업적도 참 많습니다. 대내적으로는 지방의 호족들을 포용하여 왕권을 안정시키고, 백성들을 위해서 빈민 구제 기관을 세웠으며, 세금 또한 소득의 10분의 1 이상 걷지 못하게 하는 법을 제정하기도 했습니다. 또 왕건 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북진정책입니다. 고려는 나라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입니다. 고구려의 영토를 회복해야 할 명분이 있던 것입니다. 왕건은 이런 맥락에서 북쪽 국경을 개척합니다. 또한 고려로 넘어온 발해 유민들을 따뜻하게 맞이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흩어져 있던 민족들이 한 나라에 다시 모이는 민족적 통일까지 이루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합니다. 이외에도 여진족을 공격하여, 고구려가 멸망하면서 이민족에 빼앗겼던 땅을 일부 되찾아 고려의 영토를 북쪽으로 확장하기도 하였습니다.
품느냐 내치느냐, 왕의 고민
많은 업적을 남겼지만 태조 왕건은 재위 기간 내내 큰 고민이 있었습니다. 왕의 고민이라면 한두 가지가 아니겠지만, 가장 큰 어려움은 지방 호족들의 세력이 너무 크다는 점이었습니다. 왕건은 스스로의 능력이 뛰어나긴 했지만 근본적으로 추대를 받아 왕이 된 사람이었습니다. 궁예의 폭정에 위기감을 느낀 호족들이 당신이 적임자라고 설득해서 왕위에 올랐고, 결국 왕건은 이들의 세력에 힘입어 고려를 세운 것입니다. 당시 고려는 개국 초기라 국가 전역을 강력하게 통치할 만한 제도가 없었고 군사력도 압도적인 수준은 아니었던 까닭에, 개국공신이라든지 원래 지방에 자리 잡고 있던 토착 호족 세력이 사병을 양성하는 등 자기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일단 고려의 전신이었던 후고구려 자체가 호족들의 연합체였고, 그에 따른 내부 갈등이 적지 않았습니다. 전대 왕인 궁예도 사실상 호족들 간의 갈등 속에 죽음 맞이했다고 볼 수 있죠. 거기에 후백제 세력, 발해에서 내려온 유민 세력까지 있어서 언제 어디서 반란이 일어나 왕권을 뒤흔들지 알 수가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여러분이라면 어떤 판단을 하시겠습니까? 칼을 들어 이 피곤한 무리들을 한 번에 척결하시겠어요? 아니면 머리를 써서 나에게 반대하는 세력을 교묘하게 제거하시겠습니까? 또는 사랑과 덕으로 반대파들을 내 편으로 끌어들이시겠습니까?
바다와 같은 마음으로 반대파를 끌어안다
태조 왕권은 이렇게 과격하게 반대파를 죽이거나 전쟁 속으로 내모는 방법을 쓰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들을 끌어안아 가족으로 삼는 유화책을 택합니다. 일단 성씨를 내려주어 대접해 주고, 지방 호족들 중에 딸이 있는 경우 그 딸과 결혼합니다. 이러면 딸이 수도에 있는 데다가 장인과 사위 관계에서는 반란을 일으키기가 그만큼 어려워지겠죠. 그런 명분으로 후고구려 쪽에서는 대여섯 명, 후백제 쪽에서는 서너 명, 신라 경순왕 쪽에서 한두 명, 이런 식으로 부인의 수를 늘려가게 됩니다. 말년에 헤아려보니 왕건의 아내는 무려 스물아홉 명이었습니다. 그러나 왕건이 정략결혼만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에게도 아름다운 청춘의 사랑 이야기가 있답니다. 왕건이 장군이었던 시절에 후백제와 전투를 치르면서 나주 지방을 공략하던 때였습니다. 배를 이용해 나주에 상륙해 작전을 펴던 중, 목이 말라 우물가로 갔더니 빨래하는 여자가 한 명 있었답니다. 그래서 물을 한 잔 달라고 했더니, 이 여자가 바가지에 물을 떠주면서 나뭇잎 하나를 띄워줍니다. 왕건이 왜 나뭇잎을 넣었냐고 물어보니까, 엄청 목이 말라 보이는데 급하게 마시다 체할까 봐 그랬다고 대답했답니다. 마음 씀씀이가 참 예쁘죠? 이에 감동한 왕건이 나주 호족의 딸이었던 그 여자와 결혼을 합니다. 이떻게 보면 정략적 선택이 아니라 정말 사랑해서 결혼한 여자가 바로 이 사람이었겠죠. 이 여자가 바로 둘째 부인 장화 왕후 오 씨, 나주 다련군의 딸입니다. 그리고 이들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고려 제2대 왕 혜종입니다.
꼭 왕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크든 작든 한 무리의 리더가 되어 그들을 이끌고 책임져야 할 상황과 마주칠 수 있습니다. 지금 이미 그런 고민을 하는 분도 있겠죠. 나에게 어울리는 리더십은 무엇일지 생각해 보신 적 있나요? 여러분이라면 강한 카리스마로 집단을 휘어잡고 반대파를 내치시겠습니까? 혹은 제3의 적을 내세워 내부를 다지고 자연스럽게 위험 요인을 제거하시겠습니까? 아니면 내 편과 상대편 모두를 넉넉한 마음으로 가족으로써 끌어안고 화합하시겠습니까? 정답은 없겠지만 역사를 공부하며 그에 대한 힌트를 얻을 수는 있겠죠. 우리가 역사를 공부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